기업의 이름에는 창업주의 경영철학과 정신이 온전히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들 기업이 만든 TV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고, 스마트폰으로 전화 통화와 인터넷 검색을 하며, 자동차를 타고 출근을 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삼성, 현대, SK, LG 등의 기업명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이병철 삼성 창업주

재계 1위 삼성그룹은 지난 1938년 설립됐다.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이 세운 삼성상회가 그 모태인 것. 삼성상회는 설립지역인 대구의 특산품인 건어물을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등지에 팔며 성장했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삼(三)’은 ‘크고 많으며 강한 것’이자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라고 밝혔다. 또 ‘성(星)’은 ‘밝고 높으며 깨끗하게 영원히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장은 이런 염원을 담아 ‘삼성’으로 이름 지었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
정주영 현대 창업주

지난 1946년 현대그룹의 모체인 ‘현대자동차공업사’가 세워졌다. 이보다 앞선 1940년 어느 날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하던 쌀가게의 단골손님이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 공장의 직공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시를 받았고, 정주영은 이곳저곳 빚을 내 ‘아도서비스’를 계약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를 세우는 초석이었다. 해방 직후 정주영은 1946년 4월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 내건 간판이 ‘현대자동차공업사’였는데 ‘현대(現代)’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1947년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내부에 ‘현대토건사’를 세워 건설업도 시작했다.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건설업이었지만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고, 1950년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LG그룹의 본래 사명은 ‘락희’였다. 1947년 세워진 ‘락희화학공업사’가 그 시작이다. 행운을 뜻하는 영어단어 럭키(Lucky)에서 유래했지만 이를 음역해 ‘즐겁고 기쁘다’는 락희(樂喜)라는 뜻도 내포한다. 이는 회사 설립 당시 구인회 창업주의 둘째 동생인 구정회씨의 아이디어를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58년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를 설립해 화학 회사인 럭키사와 더불어 기업의 양대 축을 구축한 구 회장은 1983년 이들 둘을 더해 ‘럭키금성’ 그룹을 탄생시킨다. 1995년 당시 구자경 럭키금성 회장은 중대 발표를 한다. 12년간 사용해 온 럭키금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LG로의 재탄생을 알린 것이다. 당시 그룹 안팎에서는 익히 알려진 그룹명을 바꾸는 일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 이를 무릅쓰고 사명 변경을 강력히 추진해 성공시킬 수 있었다.

최종건 SK 창업주
최종건 SK 창업주

SK그룹 또한 회사 창립 당시 사용한 한글사명의 영어 약자를 딴 경우에 해당한다. SK는 1939년 최종건 창업주가 설립한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1980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비디오테이프에 ‘SKC(선경화학)’라는 상표를 달아 판매하며 처음으로 영어 이니셜을 사용한다. 이후 1997년 선경그룹은 전 계열사에 걸쳐 SK로의 사명 변경을 추진해 현재의 SK그룹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롯데그룹의 사명은 문학 속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바로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인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일제강점기 때 문학가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주산 부기 등을 배워 창업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어느 날 괴테의 소설을 일독한 후 샤롯데의 베르테르를 향한 사랑과 정열에 감명 받아 1948년 회사 이름을 ‘롯데’라 칭했다.

신 총괄회장은 샤롯데가 만인의 연인이라는 상징을 지닌 것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기업이 되겠다는 염원을 사명에 담은 것이다. 롯데그룹 사명의 기원은 현재 ‘샤롯데관’, ‘샤롯데 초콜릿’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명동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옥상 하늘공원에는 샤롯데 동상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斗山)은 1896년 ‘박승직 상점’에서 시작됐다. 두산이라는 이름은 박 창업주가 1946년 무역업과 운수업을 위해 회사명을 ‘두산상회’로 바꾸면서 탄생했다. 이때 재산과 사업권은 장남 박두병에게 넘겼다. 두산은 ‘한 말(斗) 한 말 쌓아서 큰 산(山)을 이루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두산그룹의 전신인 두산상회는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기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두산상회는 정부로부터 동양맥주를 불하받아 관련 사업을 영위하며 자본을 축적했다. 기술소재사업,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 인수합병을 통해 중공업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종회 한화 창업주
김종회 한화 창업주

한화그룹은 1952년 세워진 한국화약을 모태로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젊은 시절을 보낸 김종희 창업주는 전쟁 후 한국 경제 재건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전후 복구와 재건을 위해 화약 및 폭발물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김종희 회장은 이를 기회로 삼아 화약 산업에 뛰어들었다. 화약 사업은 한화그룹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였다. 김종희는 화약 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한국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화그룹은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됐다. 인천의 한 폐허가 된 공장에서 시작한 한국화약은 1993년 김승연 현 회장에 의해 약칭인 ‘한화’로 개명한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조중훈 창업회장이 문을 연 ‘한진상사’에서 시작된 한진(韓進)그룹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 한국의 진보를 위해 한진상사가 노력하겠다’는 조 창업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조중훈 회장의 경영철학은 수송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의미의 ‘수송보국(輸送報國)’이다. 그는 이 같은 창업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동맥으로 불리는 수송 사업을 발전시켜 육·해·공 종합물류기업을 완성, 한국 경제 발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사명대로 한진그룹은 70년이 지난 오늘날 글로벌 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제시대 국내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에서 태동한 신세계그룹은 해방 후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한 후 1963년에 동방생명과 함께 삼성그룹에 인수된 동화백화점을 신세계백화점으로 개칭한 것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19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1997년에 완전히 계열 분리되었고, 90년대부터 공격적인 경영을 한 끝에 지금 신세계를 대표하는 사업들이 자리를 잡았다. 특히 대형할인점 이마트는 신세계백화점의 마트사업부에서부터 시작됐고, 후에 분리되어 현재는 그룹의 양대산맥으로 자리잡고 있다. 1963년 고객의 공모를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신세계가 낙점되며 현재의 ’신세계‘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박태준 포스코 창업주
박태준 포스코 창업주

포스코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른 일본정부로부터 우리정부에 대한 경제원조자금(ODA) 등을 통한 자본을 바탕, 박정희 대통령의 주선으로 1968년 4월1일 설립자본금 4억 원으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로 설립돼 국영기업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1973년 포항시에서 조업을 개시했다. 당시 세계 톱클래스의 일본기업 3사 야하타제철(현 일본제철)과 후지제철(현 일본제철), 일본강관(현 JFE홀딩스)의 기술 공여로 급속히 발전했다.

포항종합제철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중화학공업의 상징적 존재였다. 특히 초대 회장이었던 박태준은 포철을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철강업체로 키운 철강업계의 거목으로 꼽혀 왔다. 소위 ‘철강왕’이라 불리는 박태준은 사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인이 됐다. 명예의 전당 추천위원단으로부터의 헌정 근거는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초창기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영어 공식 회사명은 ‘Pohang Iron and Steel Co., Ltd’였는데 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약칭하여 POSCO로 호칭되었다. 그 후 2002년 3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라는 사명에서 ‘주식회사 포스코(POSCO)’로 변경됐다.

김우중 대우 창업주
김우중 대우 창업주

한때 재계 서열 2위까지 오르며 국내 경제와 산업계를 호령했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1967년 32세에 나이에 트리코트 원단 생산 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과 공동출자해 대우실업을 출범시켰다. 이 대우실업이 대우그룹의 모태가 된다. 여기서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대우는 특히 1970년대 국내 경제성장 및 수출 호조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까지 맞물려 단기간에 국내 최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의 무리한 확장과 높은 부채가 문제가 되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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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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