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청자 여러분,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 KBS 연기대상 수상 소감 중-
‘현역 최고령 배우’이자 ‘한국 TV 역사’라 불린 이순재 배우가 향년 91년의 일기로 별세했다.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 배우는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1934년 11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지난해부터 건강이 약해져 병원 치료를 받으며 복귀에 힘썼지만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이 배우는 할아버지를 따라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이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순재의 배우 길은 대학 시절부터 시작됐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시 대학생들의 값싼 취미인 영화 보기에 빠졌고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애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이순재는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면서 한국 방송 역사와 함께했다. 주요 출연 드라마로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에 달하며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는 한 달에 3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중 시청률 65%를 기록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표상이었던 캐릭터 ‘대발이 아버지’를 연기해 전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순재 배우는 노년에 더 활발한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를 벗어나 코믹 연기를 도전한 이 배우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 등을 통해 까칠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할아버지의 캐릭터를 맡았다. 특히 ‘야동 순재’ 캐릭터로 젊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하이킥’에 MBC 방송연예대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예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예능 ‘꽃보다 할배(2013)’에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나이를 잊은 열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빠른 걸음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순재는 연기를 이어나갔다. 드라마와 영화를 떠난 그는 연극 무대로 돌아와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 등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리어왕’에서는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하게 소화해 찬사를 받았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23년 연출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 배우들과 함께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지난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해 마지막 연기의 혼을 불태웠으며 2024년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됐다.
그는 연기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순재는 2024년 KBS 연기대상 수상 소감에서 “13년째 석좌교수로 있는 가천대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걱정말고 다녀오시라’고 했던 학생들 덕분에 오늘의 결과가 온 것으로 생각한다”며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한편 이순재는 인생 대부분을 연기에 바쳐왔지만 제14대 국회의원(민주자유당)을 지내는 등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명 간사 등을 역임했다.